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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조각도시> 시작, 심리, 새로운 가능성

by jj2mo 2025. 11. 19.

2025년 상반기 화제를 모은 드라마 ‘조각도시’는 일상과 감정이 조각나듯 흩어져버린 현대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 심리극입니다. 도시라는 차가운 공간 안에서 관계는 단절되고, 감정은 억제되고, 개인은 점점 자신을 잃어갑니다. 이 작품은 자극적인 서사 없이 내면의 균열, 불안, 그리고 감정 회복의 과정을 고요하지만 날카롭게 포착하며, 특히 여성 인물 중심의 복잡하고도 깊은 서사를 통해 심리 드라마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도시 속 개인의 붕괴, 그 시작

‘조각도시’의 주인공 한도연은 매일 성실히 출근하고,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침묵과 외면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감정을 숨기고 ‘좋은 사람’으로만 남으려 애쓰고, 집에서는 고요한 무표정 속에 묻혀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가까웠던 동료이자 친구인 ‘정유진’이 실종되면서 도연의 감정은 처음으로 흔들립니다. 그녀는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보다는, 그 친구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유진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을 보냈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를 알았던가’라는 자문 속에서, 도연은 자신 역시 얼마나 오래 고립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도시의 풍경은 이 고립감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건조한 회색 건물, 반응 없는 엘리베이터, 꺼지지 않는 네온 조명, 그리고 그 속에 묻힌 도연의 삶. 도시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인물을 무디게 하고 관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유기적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결국 도연은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라는 질문을 품으며, 감정과 존재의 균열 앞에 서게 됩니다.

심리를 따라 흐르는 연출

‘조각도시’는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침묵의 순간에도 강렬한 몰입을 유도하는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특히 한도연의 내면 심리에 맞춰 변화하는 카메라와 조명, 음향의 구성이 탁월합니다.

드라마 초반에는 정적인 구도와 낮은 채도의 색감으로 도연의 감정 마비를 시각화하며, 점차 그녀의 심리가 흔들릴수록 클로즈업, 어두운 톤, 파편화된 구도가 빈번해집니다. 인물 간의 거리도 시각적으로 강조되며,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프레임 안에 고립된 인물들은 심리적 단절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특히 도연이 유진의 흔적을 찾아가며 마주하는 과거 장면들은, 플래시백이 아닌 현재 시점의 심리 상태와 병치되어 연출됩니다. 이는 시청자가 도연의 현재 감정 안에서 과거를 해석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며, 그녀의 내면 변화에 훨씬 더 깊이 이입하도록 유도합니다.

사운드 역시 감정선에 맞춰 조율되며, 불안한 순간에는 일상의 소음이 과장되거나 사라지기도 합니다. 감정의 폭발이 있는 순간에는 오히려 완벽한 무음 처리를 통해 정서적 압축감을 높입니다. 이는 감정 표현을 절제하면서도 감정의 무게를 충분히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여성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

‘조각도시’는 지금까지 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온 희생, 모성, 연대 중심의 여성 서사 구조를 넘어서, 여성 인물 개인의 내면성, 모순, 복잡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주인공 도연은 누군가의 구원자도, 정의 실현자도 아닙니다. 그녀는 스스로도 자기감정에 무지했던 인물이며, 실종된 친구를 통해 비로소 자기 내면과 직면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감정적 치유나 극적 해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수많은 조각들로 부서진 존재였음을 받아들이고, 그 조각을 붙들고 살아가려는 시도를 합니다.

주변의 여성 캐릭터들 역시 단순히 도연의 서사를 보조하는 역할이 아닌, 각자의 사연과 감정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유진은 완벽해 보였지만 가장 깊은 허무를 안고 있었고, 직장 상사인 ‘서지영’은 냉철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처럼 ‘조각도시’는 여성 인물들의 감정 이면과 현실 속 복잡한 감정 구조를 감정 과잉 없이 차분하게 그려냅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누구도 전형적이지 않으며, 누구도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서사의 중심에는 늘 여성들의 질문과 혼란, 그리고 조심스러운 감정의 회복 과정이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지금까지의 여성 중심 드라마가 보여준 감정의 극대화나 희생 중심의 도식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감정 그 자체를 해석하고 질문하는 새로운 여성 서사의 길을 제시합니다.

‘조각도시’는 감정이 흩어지고, 관계가 조각나며, 존재 자체가 흐려지는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드라마입니다. 도시를 살아가는 개인, 특히 여성의 내면을 이토록 정교하고 조용하게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자극 없는 고요한 서사 속에서 진짜 감정의 무게와 복잡함을 느끼고 싶은 시청자라면, ‘조각도시’는 반드시 경험해봐야 할 심리극입니다.